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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탐방】 권성근 예비역공군소장
한국공군의 살아있는 전설… 37세에 장군 진급
2012년 11월 29일(목) 15:16 [영천시민신문]
 

↑↑ 좌로부터 최동필, 권성근, 조강호, 윤벽희 씨.
ⓒ 영천시민뉴스
서울 매봉역 근처의 한식당 한국관에서 조강호 재경영천향우회장과 윤벽희 사무총장과 함께 권성근 예비역공군소장에 식사자리에 동석하게 되었다. 미수(米壽)를 눈앞에 둔 노 장군은 서릿발처럼 정갈한 백발에 홍안의 소년처럼 단아한 모습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 일본육군의 소년비행학교를 수료한 후, 소년비행사로 말레이시아 등 남방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후 무사히 귀국하여 1950년 공군소위로 임관하자마자 6·25동란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 중 전투기조종사로서 프로펠러비행기인 무스탕기를 몰고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출격을 했다. 당시 매번 출격할 때마다 꼭 발생하는 적진 상공에서 적의 대공포에 피격되어 장렬하게 산화하면서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 얘기를 하는 노장군의 두 눈에서 눈물이 맺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치열했던 6·25전쟁의 전투장면을 직접 육성으로 들으면서 수많은 선열들의 피 끓는 애국심과 희생정신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으로 가슴이 떨려옴을 느꼈다. 권성근 장군은 치열했던 전쟁 중임에도 더 큰 임무를 가지고 미국공군대학에 파견되어 최신항공교육을 수료한 후 사천비행교육전대장으로 부임하여 수많은 전투조종사를 육성하기도 했다. 전쟁 후 1954년에는 한국공군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F-86 세이버(일명 쌕쌕이)를 도입하기위해 미국에서 제트비행교육을 받기위해 파견된 10명의 정예조종사 중 한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또 공군대학 설립 준비팀으로 세 번째 도미하여 귀국한 후 공군대학이 설립되고 초대 부교장 및 교수부장을 맡아 한국공군 현대화의 주역을 담당했다. 그후 공군소장으로 공군작전사령관을 지낸 후 예편한 권성근 장군은 1926년 영천 금호읍에서 태어난 자랑스러운 재경영천향우이기도 하다. 예편한 후에도 한국요업센타 사장, 대한손해보험협회 부회장 한국증권거래소 감사 등을 역임하면서 사회활동을 계속했고 2000년에는 공군예비역들의 모임인 공군보라매회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자식으로는 정통 재무관료출신으로 현재 국가경쟁력강화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태신 씨와 대학교수로 재직인 권세란 씨가 있다. 노장군의 회고담을 감명 깊게 들으면서 중간에 몇가지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 얼마 전 언론에서 태평양전쟁시 가미가제특공대에 한국인들도 상당수 참가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자동차도 보기 힘든 식민지 조선에서 어떻게 비행학교에 입학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요?
“일본은 처음에는 식민지치하의 조선인들에게 조종사교육을 시키지 않았어요. 아마 당시에는 조종기술이란 것이 첨단기술에 속하기 때문이라서 그랬겠지요. 그러나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이 열세로 전환되면서 조선인들도 징집을 시작했고 일본육군소년비행학교에서도 수천명의 생도를 모집하면서 조선인들도 일부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비행기란 한번도 보지 못한 신기하고 생소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친한 친구였던 일본인주재소장의 아들에게서 소년비행학교 생도모집에 대한 정보를 듣고 같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하늘을 새처럼 난다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발동했고 이왕 징집될 바에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비행기조종사가 되고 싶었던 거지요. 같이 지원했던 일본인친구는 떨어지고 혼자만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에 건너가서 교토에서 2차 신체검사, 그리고 큐슈에 있던 육군소년비행학교에서 3차 시험에 합격하여 1943년 10월에 입학하게 되었지요. 입학동기생이 무려 2000명이나 되었는데, 조선인들도 4~50명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해방 후 경산 와촌국민학교와 금호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다시 공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까?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조종사로 일본의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일본이 패망한 후 천우일조로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0월에 교원채용시험에 합격하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와촌국민학교에 부임하였습니다. 해방직후라 아무런 교육적 준비와 환경이 열악했고 선생님들도 모두 일제치하에서 교육받은 지식밖에 없어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1년후 쯤 경북중학교 사범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국어와 역사 등 새로운 교육을 받고 다시 모교인 금호국민학교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해방 후 혼란시절에 학교재산을 횡령하고 착복하는 등 비리를 저지르던 함경도출신의 교장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교장의 배경이던 서북청년단의 협박과 신변의 위협까지 받게 되자 대구로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대구에서 숨어 지내던 어느 날 소년비행학교시절의 동기생을 만나 서울에 창설된 국방경비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군장교시험에 응시하여 소정의 교육을 받은 후 6·25동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공군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지요.”

- 전투기조종사로서 6.25동란에 직접 참전하면서 가장 잊지 못할 기억 하나만 말씀해주시지요?
“6·25동란 중 얘기는 전사로 모두 기록되어있지만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전쟁발발 시 얘기는 말도 안 돼는 참담한 상황의 연속이라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6월 25일 오전 10시경 북한비행기가 여의도와 영등포지역을 공습하자 영등포경찰서장이 달려와 항의를 했습니다. 당시의 유일한 한국공군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비행장을 공습했던 것인데 황당하게도 우리 공군의 훈련 중 오발사고로 착각했던 것이지요. 그때의 북한기인 소련제 IL-10전투기의 번쩍이던 동체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여의도비행장에는 20여대의 L-4 연습기와 애국헌납금으로 캐나다에서 도입한 AT-6훈련기 10대 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격납고 안에 있어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오후에는 간신히 부평에 있던 미군탄약고에서 15kg짜리 폭탄을 가져오게 되어 훈련기에다 싣고 바로 출격을 감행했습니다.
2명의 조종사가 타고 폭탄 2개와 수류탄 몇 개를 싣고 동두천 쪽으로 비행했지요. 앞좌석은 제가 타고 뒷자리의 조종사는 손으로 폭탄과 수류탄을 투하하고 만약 내가 전사할 경우 조종간을 넘겨받아 돌아오기로 했지요. 동두천 쪽으로 비행하여 보니까 좁은 도로로 적의 전차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거예요. 선두전차를 부수면 전차행렬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외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선두전차 바로 가까이 접근하여 손으로 폭탄을 투하했지요. 포탄이 터지면서 먼지가 일어나면서 선두전차가 멈췄습니다. 이제 됐다고 환호성을 터트렸지만 잠시 후 먼지가 걷히니까 적의 전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절망감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합니다. 이게 바로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6·25가 터졌던 바로 그날 얘기입니다.”

- 장군진급을 하면서 초대 공군군수사령관에 취임하여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고 들었습니다.
“소위에서 대령 진급하는데 5년 걸렸는데 대령계급장만 8년을 달았습니다. 그래도 만 37세에 장군진급을 했으니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엄청 빠른 거지요. 하지만 공군창설에 이어 6·25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장교들이 전쟁 중에 전사하는 가슴 아픈 사실을 같이 얘기해야 되겠지요. 대령으로 대구항공창장으로 부임하여 바로 장군으로 진급하여 군수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하게 얘기하기에는 그렇고 수많은 군수물자가 한마디로 장부상 수치와 실제수치가 엄청나게 차이가 많이 났지요. 그래서 실제재고로 장부를 다시 작성하게 하고 그 시점을 원점으로 하여 철저하게 원칙적으로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처음으로 관리메뉴얼을 만들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최동필 서울본부 기자
영천시민신문 기자  smtime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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