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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탐방】 前)국민대 총장 정암(定庵) 정성진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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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발전에 노력… 영천향우는 운명같은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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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1월 08일(화) 16:50 [영천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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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정성진 전 국민대총장(좌)과 조강호 영천향우전국연합회장. | | ⓒ 영천시민뉴스 | | 국민대학교 총장을 지낸 후 지금은 국민권익위원회로 바뀌었지만 2004년에서 2007년까지 대통령직속의 부패방지위원회(2005년 국가청렴위원회로 명칭 변경) 위원장을 지낸 후 이어 법무부장관에 취임했던 정성진 박사는 1940년 우리 고향인 영천 신령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서애 유성룡과 함께 옥중의 이순신 장군을 적극 변호하여 구해냈던 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또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유학자였고 명재상인 약포 정탁선생 집안의 후예이기도 하다. 정성진 박사는 1958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여 격동기의 혼란한 시국에 4·19의거에 직접 참여하는 등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고뇌와 울분에 찬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졸업하던 해인 1963년 제2회 사법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사법연수원과 공군법무관을 거쳐 1969년 의정부지청 검사로 검찰생활을 시작한 후 서울지검 특수3부장, 대검 중수부 1과장, 제주지검장, 대검 총무부장,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구지검장, 1993년 대검 중수부장 등 요직을 거쳤다. 한편 검찰 재직 중인 1988년에는 경북대학교에서 ‘부정경쟁행위론’이라는 논문으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퇴임 후에는 2년간 미국 스탠퍼드대 및 일본 게이오대학 방문연구원을 거쳐 1995년 국민대 법대의 형사법 교수로 부임했다. 학자와 교육자로 변신하면서 많은 논문과 연구보고서 발표와 저서 출간, 판례평역 등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면서 사법시험위원, 중앙선관위 위원, 국민대학교 법학연구소장, 한국형사정책학회, 한국형사법학회 회장을 지내면서 법리탐구와 학문연구에 매진했다. 2000년에는 학교법인이사회의 만장일치로 국민대학교의 총장으로 선출되어 4년간의 총장임기를 끝낸 후에는 한국법학원 원장과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 법무부장관을 지냈고 현재 국민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2011년에는 해마다 서울대동문회에서 발표하는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인터뷰를 위하여 자택을 방문한 재경영천향우회 조강호 회장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정성진 박사의 첫인상은 맑고 깨끗한 옥골선풍의 옛날 선비같은 느낌을 주었다. 천으로 된 오래된 소파와 선풍기 등 검소하고 단출한 집기들이 자리잡은 거실에서 편안하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 영천 신령에서 태어나서, 해방과 6·25동란 등 어렵고 혼란한 시절 학창시절을 보내셨네요. 그시절 고향얘기와 학창시절 이야기를 좀 부탁드립니다.
“1940년에 영천군 신령면 화성동에서 태어났습니다만 8살 때 대구로 이사하여 고향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 편입니다. 다만 모친께서 신령초등학교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했고 모친과 대구사범 1회출신의 동기동창이었던 부친께서도 신령면장을 지내시기도 해서 고향인 신령에 자주 왕래하기는 했습니다. 전쟁 중이던 1952년에 경북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중학입시국가고사를 치렀는데 전국수석(500점 만점에 482점)을 하여 부모님들이 많이 기뻐했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학창시절은 전쟁전후의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래도 부모님의 안정적인 뒷받침으로 남들보다는 형편이 좀 나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서울법대 졸업후 바로 사법시험(2회)에 합격하셨습니다. 자유당 말기 혼란한 정국과 4·19혁명과 5·16혁명 등 격동의 시절에 고시공부를 하시고 합격하셨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얘기를 부탁드립니다.
“대학 2학년때 4·19혁명이 터졌습니다. 학생의거를 앞장서서 주도하는 역할까지는 성격상 하지 못했지만 당시 연일 계속되는 데모에는 친구들과 빠지지 않고 참여했습니다. 4월19일 당일에도 서울대학생은 물론 서울 시내 모든 대학생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함성을 지르면서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었지요. 경무대 앞에서 경찰들의 발포로 선두에 섰던 학생들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던 모습들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그후 고시공부를 위해 은해사의 운부암과 보현산의 법룡사에 몇 달 들어가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률서적보다는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지계(持戒)와 선정(禪定)을 익히며 마음의 평정을 가다듬었던 그 시절이 지금 생각하면 매우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시대적인 아픔과 젊은 날의 고뇌로 방황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을 깨닫고 삶의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사색을 하면서 보냈던 그 시절은 법조인이 된 후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7면에 계속>
- 1969년 의정부지청 검사로 검찰생활을 시작한 후 1993년 대검 중수부장으로 퇴임하실 때까지 25년간의 검찰생활을 하시는 동안에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으로 공사구분이 확실한 원칙주의자이지만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시한 스타일로 정평이 났다고 합니다. 오랜 검찰생활 동안 특히 보람으로 기억나는 일은?
“중수부 과장, 중앙지검 특수부장으로 효성그룹 등 기업의 토지재매입사건, 명성그룹사건, 대규모딱지어음사건 등 대형사건을 담당하여 무난히 해결했던 것도 보람으로 기억나지만 검찰연구관으로서 종합민원실예규를 처음 만들었던 일, 법무부 법무실장 재직시 검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통일법무과나 해외주재법무협력관제를 초기에 만들어 법무·검찰업무의 선진화를 위해 일조한 일들이 보람으로 기억에 납니다. 그리고 재직 중에는 공사구분을 철저히 하고 동료들 그리고 직원들과의 대화를 비교적 중시했다고는 할 수 있지요.”
- 1993년 문민정부시절,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시 부인의 상속재산이 많다는 것이 논란이 되자 미련없이 검찰을 떠났습니다. 2004년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으로 4년간 재임한 후, 2007년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공직으로 복귀했습니다. 당시 검찰을 떠날 때 아쉬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1993년 제가 대검 중수부장으로 취임했을 무렵 막 출범한 문민정부에서 국정개혁과 쇄신이라는 차원에서 고위공직자재산공개가 처음으로 시행되었지요. 아내의 상속재산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것은 제 나름대로의 철저한 공사구분의 원칙에 입각한 공직관으로 봉직해온 지난 25년간의 검찰생활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검찰내부에서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정권교체에 따른 뭔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정권의 기대와는 달리 법무부와 검찰수뇌부는 아무런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도 사직해야 될 이유는 없었지만 검찰조직의 보호와 제 스스로의 재충전을 위해 미련없이 제가 검찰을 떠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솔직히 당시를 돌이켜보면 오랜 검찰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고 있던터라 나 자신 스스로에 대한 변화와 재충전에 대한 욕구도 강했기 때문에 그런 용단이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사임 후 바로 미국의 스탠퍼드대학과 일본의 게이오대학에서 2년간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로서 연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검찰을 떠날 때 많은 검찰후배들이 사직을 만류하며 아쉬워했지만 재직동안에도 틈틈이 기웃거리던 학문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제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듯한 희열을 느끼면서 법조실무와는 또 다른 학문의 영역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1995년 국민대 법대 형사법 교수로 부임하여 2000년에는 국민대학교의 총장에 선출되어 4년의 임기동안 학내분규를 원만히 해결하고 대학재정상태를 건실하게 확보하는 등 탁월한 관리능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4년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 2007년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하면서 학계를 떠나게 되었는데 아쉬움은 없었는지요?
“국민대학교에서 형사법 교수로 5년, 총장으로 4년간 재임했습니다. 지금도 당시의 교수들이나 직원들을 만나면 당시 국민대의 대외적 위상도 많이 높였지만 그때가 학교 구성원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유례없이 ‘평화로웠다’는 말을 해주어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래도 저는 관료쪽보다는 교육자체질이 아닌가 생각도 드네요. 또 2002년에 학계와 법조실무계간의 가교 역할에 기여했다는 뜻으로 대한변협의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상한 것도 학계에 종사한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닙니다. 2001년 한국형사법학회 회장임기를 마치면서 사재로 ‘정암 형사법 학술상’을 제정하여 지금까지 매년 가장 우수한 형사법 관련 논문에 대한 포상을 하는 등 지금도 연구활동 및 학계와 관련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어 학계와 연계를 유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 지난 달 문화일보(11/8일자)에 게재한 ‘검사와 정치인’이라는 시평(時評)을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요점만 간단하게 다시한번 정리해주신다면?
“최근의 대선정국에서 유력대선후보들은 모두 ‘검찰개혁’ ‘정치쇄신’을 내세워 검사와 정치인을 ‘개혁’ 또는 ‘쇄신’의 대상으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인이나 검사나 모두 권력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개혁의 대상이 된 거지요. 검사들은 정치권 등 외부의 개혁요구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뼈를 깎는 자성을 통한 환골탈태가 필요하고 정치인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참다운 경장(更張)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국민정서에 입각한 당위론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 오랜 검찰생활을 하게 되면 보통 가정에 소홀하기가 쉽다던데 사모님의 내조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족들 얘기도 좀 해주십시오.
“중국 원대의 재상이자 대학자인 魯齋 許衡의 글에 ‘세상에 나가서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 살면서는 스스로를 잘 지키라(出則有爲 處則有守)’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의 집사람은 제가 미흡한대로 분수를 지키면서 살 수 있도록 평생의 반려로서 인내하고 절제하는 생활로 저를 도와주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공직에 재직중 일때는 아내가 동창회나 계모임 같은데도 일체 못나가게 하여 힘들고 재미없게 살게 했던거 같아 지금은 많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슬하의 2남 1녀도 모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충실하면서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 특별한 걱정은 없습니다.”
- 오랜 법조생활을 하시면서 벌써 고희(古稀)를 넘기셨는데요. 우리 고향 영천에 대한 생각과 고향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나름 바쁘게 살아오다보니 사실 그동안 고향에 무심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향우회 행사도 자주 참석하고 우리 고향 영천의 발전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 영천향우들은 같은 고향 출신으로서의 단순한 지연이나 향토의식보다는 일종의 인연이나 운명과 같은 공동체의식 그리고 인정이나 향수를 바탕으로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보다 승화된 일체감을 가지고 지내는 것이 소망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최동필 서울본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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