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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전투 아시나요… 6·25전쟁 발발 후 국군대승으로 반격 발판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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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6월 16일(월) 14:56 [영천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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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전투는 전쟁 발발 후 최초의 국군 대승이었으며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막아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아주 중요한 전투이다. 후일 김일성은 영천 전투의 패배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50년 영천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는 영천전투를 포함해 크게 5개의 전투로 나뉜다. 호국의달을 맞아 보현산과 신녕, 영천을 오가던 영천지역의 격전현황을 전쟁기념관 자료를 토대로 되짚어 본다. (사진출처 :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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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마지막으로 공세가 가해진 영천전투 당시 8사단 21연대 장교들의 모습. | | ⓒ 영천시민뉴스 | |
1. 보현산지구 전투
- 전투시기 : 1950.8.13~9.4
- 주요지휘관 : 최덕신 대령, 박치옥 소령
청송 현동면의 구산동, 도평동, 월매동, 운계산을 연결하는 방어선에서 격멸당한 적 제766부대의 남은 병력이 아군의 경비망을 피해 보현산 북쪽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병력을 다시 집결시켜 후방으로의 침투를 노리고 다음 공격을 위해 증원부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청송쪽으로 침입했던 적 제 12사단의 일부 병력이 이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입암을 지나 내려왔다. 또 보현산지구의 적 제 766부대의 남은 병력도 적 제 12사단의 일부 병력과 합쳐졌다.
8월 7일 적은 유격전을 치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보현산 주변에 있는 아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아군이 열세였으나 8월 13일부터 9월 4일까지 무려 22일간 우세한 적을 억류하고 견제했는데 이는 험준한 지세를 잘 이용한 것과 필승의 신념 덕분이었다.
8월 15일 이후 적 제15사단이 이곳에 투입되어 전황이 극악의 사태로 치달았고 아군은 혈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패전으로 보기보다 승전한 영천지구전투의 전위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방어보다 공격으로의 전환을 위한 준비단계의 전투였다.
2. 신녕 조림산지구 전투
- 전투시기 : 1950.8.30~9.4
- 주요지휘관 : 김익렬 대령, 함병선 대령
8월초 안강, 포항지구로 침투하려던 적이 의성 지구에서 입은 병력 손실 때문에 의흥, 신녕지역으로 진출했고 이에 아군 제 6사단이 적의 최후 공격을 저지했다.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분전난투를 거듭했던 제 6사단의 신녕 지구 싸움은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의 야욕을 완전히 수포화시켰던 전투였다.
특히 9월 4일에는 제 19연대의 1대대가 화산동 깊숙이 숨겨놓은 적의 전차 8대를 발견하고 특공대를 파견하여 모두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3. 신녕 화산지구 전투
- 전투시기 : 1950.9.6~9.15
- 주요지휘관 : 김익렬 대령, 허용우 소령
9월 4일 북한군이 영천을 점령하자 북한군 제 8사단이 신녕으로 진출했고 아군은 적의 남진을 막기 위해 포병으로 방어했다.
9월 7일 조림산과 운산동에서 침입한 적 1개 대대 병력이 합세하여 공격했으나 아군도 포병의 집중화력으로 크게 이겼는데 유재흥 준장이 각 연대에게 되도록 많은 예비대를 보유하도록 지시했던 것이 승전으로 이끌게 된 이유였다.
이날 제 7연대의 방어진에서도 2개 대대병력의 공격으로 피아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는데 아군은 진지를 약간 뒤로 이동하고 전 화력을 집중 발포했으며 미 공군 전폭기의 지원 사격과 포병의 지원 화력 그리고 각 대대의 박격포 사격으로 적의 인해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8일부터 15일까지 전투에서 아군은 수차례 승전했으며 적은 시체를 버린채 황망히 퇴각했다.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이루어졌고 장병의 사기는 충천했다.
신녕-화산 지구 전투는 신녕-조림산 지구 전투와 더불어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적 8사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여 북진반격의 기반을 마련한 전투이다.
4. 영천지구 전투
- 전투시기 : 1950.9.5~9.13
- 주요지휘관 : 이성규 준장, 고근홍 중령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 남침을 감행 후 계속적인 퇴각으로 밀리던 국군은 8월 칠곡ㆍ왜관의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미군은 왜관지구, 국군은 다부동지구 신녕지구 영천지구 기계~안강 지구 포항지구에 방어선을 구축해 조직적인 방어전을 전개했다. 이 방어선은 아군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국가의 국운이 걸린 최후의 보루였다.
1950년 9월 5일 북한군 제15사단은 증강된 5개 연대와 전차를 앞세우고 제2군단 (군단장 준장 유재흥) 제8사단 정면으로 돌진해 영천이 함락되었다.
제8사단장 준장 이성규는 영천 북쪽에 21연대와 16연대를 배치해 적의 증원 부대와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했고 아화리와 유상리 일대를 고수하도록 16연대와 1사단 11연대 적을 공격했다. 포항 전선에 참여했던 10연대도 긴급히 원대 복귀하여 작전에 참여했다.
국군은 10여 일간의 필사의 공방 끝에 빼앗긴 영천을 탈환하여 9월 이전의 낙동강 방어선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퇴로가 차단당한 적은 포위망 속에서 큰 타격을 입고 일부의 패잔병만이 도주했다.
영천 전투는 전쟁 발발 후 최초의 국군 대승이었고 또한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막아 진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영천 대첩에 소요된 아군과 북한군을 비교해 보면 한국군은 병력이 1만5000명, 북한군은 1만2000명으로 한국군이 많았다. 화력은 한국군이 57㎜ 대전차포 6문과 곡사포 105㎜ 26문에 불과했지만 북한군은 76㎜ 대전차포 38문, 곡사포 122㎜ 18문, 전차 T-34 12대로 한국군보다 월등했다.
영천 대첩에서 전차, 박격포, 대전차포, 로켓포 등 수 많은 무기를 포획했고 사살된 북한군이 3799명, 포로 209명이다.
5. 신녕-조림산 진격전
- 전투시기 : 1950.9.15~9.22
- 주요지휘관 : 김익렬 대령, 허용우 소령
9월 15일 아군은 인천 상륙작전에 발맞추어, 지루한 방어전에서 총 반격전으로 전세가 변했고 아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9월 22일 제 6사단은 신녕 부근의 요지인 조림산을 점령, 확보하여 계속 도원동-함창-충주 선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적 제 8사단(사단장 소장 오백용)은 조림산 부근에서 제 6사단에 의하여 참패를 당하고,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의성-청송 방면으로 패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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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열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신병들. | | ⓒ 영천시민뉴스 | |
유재흥 장군이 구 전사편찬위원회에 증언한 내용
만약 적이 대구로 향하면 2군단뿐만 아니라 미 제1기병사단의 후방까지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적이 경주로 향하면 12사단과 합세해 부산으로 직접 진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전선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판단했다.
대비책을 논의하고자 1사단장, 6사단장, 참모들을 모아 놓고 급히 군단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영천은 오늘 밤이 고비인데 전세는 불리하며 육군본부도 부산으로 이동했다. 만일 영천선이 무너지면 우리는 부산교두보선으로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나는 현 방어선을 한 자 한 치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1사단과 6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씩을 뽑아 중점적으로 병력을 집중 사용할 방침이니 나의 최종 결의에 동의해 주기 바란다.” 이러한 군단장의 결심에 대해 두 사단장은 “담당 정면에도 병력이 모자라서 적을 막아내기가 힘든 이때에 1개 연대를 차출한다는 것은 전 전선의 위기를 자초하는 도박”이라며 병력 차출에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다.
나는 “적의 주공이 영천 정면이라는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라며 “만일 적이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 혹은 경주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우리의 급선무는 영천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양개 사단에서 1개 연대씩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도박이 아니다”며 “적은 이번 공세에서 이미 약화됐기 때문에 우리가 병력을 전용해 중점적으로 집중 사용한다면 기필코 적을 격파할 수 있다”고 나의 결심을 피력해 회의 참가자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2개 연대 차출 결정을 내린 후 다음 문제는 전차였다. 전차 1개 소대(5대)만이라도 있다면 적에게 큰 위협이 되고, 아군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미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을 만나 전차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군 사정도 급했기 때문인지 ‘힘든 일’이라고 대답했다. 게이 소장은 “귀 군단은 후퇴할 것인가요”라고 질문해 왔다. 나는 “더 이상의 후퇴는 원하지 않는다”며 “전차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이 직접 선두에서 싸우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게이 소장은 “신중히 생각해 보자”며 약간은 함축성 있게 대답을 했다.
미 8군사령부로 찾아가 워커 중장에게 “2군단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전차가 꼭 필요하다”고 다시 상황을 설명하자 “게이 소장과 협조해 보라”고만 할 뿐 확답은 없었다. 전선 상황이 급박해 일단 국군 8사단으로 돌아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미군 측에서 “내일 아침부터 미군 전차 1개 소대가 지원할 것”이라고 통보해 왔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확보한 2개 연대와 전차 소대는 아군의 영천전투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010-06-09 09: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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