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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근대사의 산 증인 해동제약 성호용 회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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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에서 출발한 지역 유일 제조회사 해동제약
영천군문화재보호위원회 조직
은해사 되돌려달라 탄원서 받아
영천문화원 2대 원장 역임
영천최초 로타리 클럽 창립
사람돕는 기억만 자식에게 물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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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03일(화) 13:07 [영천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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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생인 성호용(87) 전 해동제약 회장은 영천의 60~70년대를 어끌어온 리더이자 지도자이다. 성 회장을 만난 것은 신녕면 치산리 현재 성 회장의 집에서였다. 그의 고향은 당시 화북면 대천리(현재 화남면)이지만 신녕에 집을 마련해 현재 서울과 영천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그의 집에는 성회장과 아들 성태락씨, 그리고 지인인 김범준씨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마른 체형의 성 회장은 나이에 비해 혈색이 좋고 눈빛이 빛났으며 과거를 술회하는 목소리는 활기차고 거침이 없었다.
성 회장과 인터뷰를 하던 두세 시간 동안 그가 가장 많이 반복했던 말은 ‘지난 이야기는 몇 일을 이야기해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영천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20여년의 기간동안 영천 은해사를 바로잡고 영천문화원을 설립하였으며 영천로타리클럽을 창립하고, 영천상공회의소 설립의 기반을 다진 후 이후 서울에 상경해서 재경영천향우회를 만들기까지 수 많은 일들이 마치 활극처럼 진행되었던 것이다. 사실 60~70년대 영천의 주요 현대사를 술회하기에는 턱없이 시간이 부족한 것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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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 60~70년대 이야기를 술회하는 성호용 회장 2) 40대 초반의 성 회장이 재경향우회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3) 영천문화원장을 하던 1970년 당시 경향신문에 기고한 성 회장의 글 4) 현재 문화역서울 284 (구 서울역사)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전시에 해동제약의 인삼사물탕이 전시되고 있다. | | ⓒ 영천시민뉴스 | | # 해동제약사를 운영하다
영천에서 1960~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성호용’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한다. 혹여 이름이 생소한 이들도 ‘해동제약’이라는 제약회사는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해동제약’ 마저 가물가물하다는 이들에게 이 회사의 대표 상품인 ‘인삼 사물탕’을 알려준다면 무릎을 탁 치며 생생하게 기억을 떠올린다.
인삼 사물탕은 현재의 ‘박카스’처럼 60년대 중반 우리나라 전역을 강타했던 제약음료였다. 차남 태락씨는 “해동제약이 60~70년대 당시 영천의 유일한 제조공장이었다. 당시는 술도가와 정미소 외에는 공장이 없던 시절이다. 아버지의 해동제약은 영천에서 출발한 지역 유일의 제조회사였다. 해동제약의 가장 히트상품은 ‘인삼사물탕’이다. 서울로 옮기고도 1975년 까지 보사부 허가를 받아 완제품을 일본에 수출한 대한민국 유일의 회사였다. 당시 완제품 수출 랭킹 1위가 해동제약의 ‘인삼사물탕’으로 ‘수출의 날’이 되면 아버지께서 늘 의약품부문 수상 대상자가 되셨다.”고 설명했다.
# 영천 근대사의 산 증인
성호용 회장의 행적은 그러나 해동제약을 운영한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1960~70년대 영천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상당히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자신의 치적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성 회장의 성품과 영천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사연들이 겹쳐 그는 영천사회에서 잊혀져간 인물이 되어갔다. 또 그를 기억하는 세대들이 이젠 고령인데다가 이미 고인이 된 인사들도 여럿이니 세월의 탓도 있을 것이다.
성 회장은 “내가 태어난 영천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젊은 나이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영천을 위해 많은 일을 해보려 했는데 끝을 보지 못했지요. 당시는 영천군수가 오면 마지막 군수고 경찰서장이 오면 마지막 서장이란 말이 있을 만큼 영천 정서가 삭막했어요. 나도 영천사람의 투서로 결국 서울로 쫒겨 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라며 당시를 술회하기 시작했다.
71년도 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전후로 영천을 떠났다던 성 회장의 나이가 당시 40대 초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술회하는 영천에서의 활동 시기는 성 회장의 30대인 셈이다. 고희의 나이에도 문중의 청년을 자처해야 하는 고령화된 영천의 현실에서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성 회장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당시 은해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긴 과거사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 은해사를 되찾다
“당시 은해사 뒤편에 현재 능인중학교의 모태인 오성중학교가 있었어요. 당시는 오성중학교 재단에서 은해사를 관리했는데 17명의 개인에게 조각조각 팔려나갈 위기에 처하게 된거예요.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을 하시던 청담스님이 ‘우리 스님들은 힘이 없으니 성회장이 은해사를 좀 찾아 주시오’라고 간절히 요청했고 나 역시도 국가로 봐서는 큰 문화재요, 불교계로 봐서는 조계종10교구 본산이요, 영천사람들에게는 유일한 유원지인데 은해사가 개인에게 팔려가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성 회장은 그때부터 동에서 한사람씩 추천을 받아 영천군문화재보호위원회를 조직했다고 했다. 성 회장이 직접 위원장을 맡았고 부위원장은 제5대 민의원(1960. 7. 29~ 1961. 5. 16, 영천군 갑 , 신녕면, 대창면, 금호면)을 지낸 조헌수 의원이었다. 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영천 은해사를 되돌려 달라는 탄원의 서명의 받았는데 그 양이 책 다섯권 분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재판은 10년이나 계속되었고 대법원까지 가서야 승소를 하게 되었다.
“재판이 계속되는 동안 학교 재단 측에서 돈이 든 라면박스로 회유를 하기도 했고, 삽을 든 건장한 사내들에게 위협을 당하기도 했어요. 긴 소송 끝에 재판에서 이기고 나니 또 상대편 학교 인사 중에 이미 자기 아버지 산소를 은해사 그 땅에 쓴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산소만은 봐달라고 통 사정을 해서 조상을 섬기는 마음으로 그냥 넘겼는데, 그 산소가 아직까지 그곳에 있더군요.”
성 회장은 소송에서 이긴 이후, 은해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며 말을 이어갔다. 사찰 단청사업과 주차장 확보, 길 확장공사로 이어지는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은해사에 주차장이 없어 성회장이 사비로 땅 660㎡(200평)을 기증해 주차장을 확보하기도 했다. 진입로 확장 공사도 인근 군부대를 설득해 어렵게 진행했다.
“공사를 하는데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일명 ‘밀가루 공사’였죠. 돈이 없으니 밀가루를 공사비용으로 대신 주고 길 확장공사를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공사를 관할하던 모 공무원이 밀가루 7포를 빼돌렸던 사건이 있었어요. 내가 엄청나게 화를 냈던 기억이 나요.”
은해사 개발을 마치고 총무원에서 첫 법회를 열던 날, 성 회장의 말을 빌리면 “영천에 사람 생기는 대로 다 모였다.”고 한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로 법회가 끝나고 밤새도록 집에 걸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경찰서장의 승인 하에 통행금지를 해제하기도 했다. 법회에는 청담스님을 비롯해서 총무원의 높은 분들이 모두 영천에 내려왔다고 했다.
사찰을 되찾고 난 후 은해사에서는 성 회장에게사찰 소유의 야산 3300㎡(1000평)을 감사의 표시로 주겠노라고도 했고, 또 공덕비를 세우자는 주장도 많았지만 그때는 성 회장도 나이가 젊고 성품 또한 강직해 “댓가를 받거나 이름을 남기고자 한 일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호통을 치고 거절했다고 한다. 훗날 염길정 국회의원도 은해사 일을 듣고 성 회장을 찾아와 “이런 일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아니다. 비가 싫으면 돌에 이름만이라도 세기자”라고 설득했는데 성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은해사에 다녀온 성회장은 “내가 젊은날 치열하게 투쟁하고 개발했던 흔적이 전혀 없고 또 사찰의 누구도 나를 아는사람이 없더라”며 이제야 섭섭한 생각이 든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 국회의원 후보로 물망에 오르다
“전국적인 법회가 성황리에 끝나자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는지 중앙정보부에서 올라오라는 초청장을 보내왔어요.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중앙정보부 모임에는 약 19명 정도가 모였는데 제 기억으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포함된 국내 거물인사들이었었죠. 초청행사를 마치고 당시 통일호를 타고 대구역으로 돌아와 기차에서 내리는데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있는 거예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고 온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던 거지요. 당시 도지사와 교육장 경찰서장이 등 많은 기관장들이 기차역에 마중 나와 있었죠.”
1971년 성 회장은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청담스님의 “조계종 500만 신도 대표로 성호용 거사를 추천합니다.”라는 추천의 글로 당시 제9대 국회의원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박대통령의 육사 동기생이었던 권오태씨와 경합을 벌이다 사퇴하기도 했다고 한다.
# 영천 문화원 건립 토대를 마련하다
성호용 회장은 영천문화원의 제2대 원장이다. 2012년 문화원을 방문한 성 회장은 문화원 이사들에게 ‘이 문화원이 최초에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문화원을 설립하고 건물을 올리게 된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성 회장은 1967년 영천문화원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시 박신백화점 사장이던 박병호 초대 원장의 취임을 주관했으며 다음해인 1968년 5월 지방문화원 설립 허가를 받아 같은해 10월 원사를 착공하기까지 영천문화원 설립의 일련의 과정을 직접 관장한 장본인이다.
“문화원을 제대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문화공보부에 다니면서 당시 돈으로 400만원의 예산을 확보했어요. 그리고 영천군내 체육관을 지으려던 예산 400만원을 교육감에게 빼앗다시피 해서 받아왔어요. 그 800만원이 현재 문화원 건물을 짓는 종잣돈이 된거죠. 거기에 시민들의 기부가 십시일반 보태져 문화원 건물을 짓기 시작했죠. 당시는 시대가 어둡고 부정부패가 많았던 때라 문화원을 건립한다는 말이 삽시간에 퍼져 건설을 하던 사람들이 돈 봉투를 들고 수차례 찾아오기도 했어요. 이 사람들이 군수를 찾아갔는데 군수가 성호용씨가 주관하는 사업이니 그쪽으로 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한마디로 모두 식겁을 하고 돌아갔어요. 그렇게 세운 건물이 지금 현재의 문화원이예요”
그러나 문화원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던 성 회장은 문화원의 완공을 보지 못한채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성 회장은 영천군문화재보호위원회와 영천문화원 원장을 역임했던 1960년대 당시 국보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1962년)과 보물인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1968년), 영천신월동삼층석탑(1968년) 등의 문화재 지정에도 많은 열정을 쏟았노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 영천 로타리 클럽을 창립하다
1969년 영천에 최초의 로타리클럽을 창립한 장본인 역시 성호용 회장이다. 성 회장은 “총재였던 김종인씨를 찾아가 우리 영천에도 로타리 클럽을 설립해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1969년 당시 큰 도시에만 설립돼 있던 로타리클럽이 영천처럼 작은 도시에 설립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영천로타리클럽에서 성 회장은 1대에서 3대까지 회장을 지내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로타리클럽에 이어 지역에 상공회의소의 필요성을 느끼고 상공회의소 창립을 주관하며 터전을 잡았으나 1971년 사업상 일어난 일련의 사태로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떠나게 되었다.
# 재경영천향우회를 설립하다
서울에 올라갈때는 돈도 많이 잃고 거의 빈손으로 갔어요. 그런데 운이 좋아서인지 제약회사가 잘 된거예요. 당시에도 약을 제조해 외국에 수출하는 회사는 우리 회사밖에 없었으니까요. 연중 절반은 한국에서 절반은 일본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아직도 일본어는 자신있죠. 일본에서 큰 회사와 합작해 합작회사를 운영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 서울에서도 사업을 확장하여 자리를 잡은 성 회장은 고향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섭섭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향우회를 결성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고향사람 20여명을 모아 향우회를 시작했고 최석암 씨를 회장으로 내세우고 성 회장은 운영부회장을 맡아 향우회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향우회 만들 때 이야기를 하려면 정말 사나흘은 걸릴거예요. 20명으로 시작한 향우회원을 1000여명이나 모았으니까요. 저녁마다 사람 만나고 밥먹고, 커피마시고 했어요. 그때는 식당에 가면 신발을 훔쳐가는 도둑들이 허다할 때였어요. 향우회를 조직하기 위해 식사를 하다가 신발을 잃어버려 맨발로 집에 돌아온 적이 수차례예요. 향우회 행사를 할때는 각 회원들의 사업체를 돌며 트럭 가득 경품을 걷으러 다니기도 했죠. 그렇게 모인 향우회원이 현재는 6000명에 육박합니다.”
그렇게 고향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다보니 별별 사람들이 성 회장을 찾아와 갖가지 청탁을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딸의 혼사를 앞두고 결혼비용을 대달라는 사람, 아버지 초상치를 비용이 없다는 사람 등 갖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성 회장을 찾아와 사연을 이야기 하고 자금을 융통해 달라고 요청했고 성회장은 이들이 어려울때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들을 도왔다. 사비를 털어 일년에 10명의 향우회 회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했는데 그것이 기초가 되어 현재 인재양성 장학사업으로 확장되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누군가 잔치를 한다고 하면 화환 보내지 않은 곳이 없고, 어렵다는 집에 50만원 100만원 아깝다는 생각 안하고 부조를 했어요. 딴사람들은 돈벌어서 알뜰이 모아 자식들 챙기는데 나는 사람 돕는 기억만 자식들에게 물려줬으니 아들 보기 미안한 마음도 들어요.”
이러한 성 회장의 행보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주목을 다시한번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사람이 목적없이 자기 돈을 저렇게 쓰겠냐는 것이 주 요지로 정치의 큰 뜻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고 당시 청와대 직할 중앙위원인 농수산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고향의 추억과 지인들을 회고하다
성 회장은 세 아들과 함께 해동제약을 운영하다 69세 되던 해에 사망선고에 가까운 암 선고를 받고 홀연히 고향에 내려와 16년간 주로 혼자 지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성 회장 본인조차 “암 선고를 받은 자신이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2013년 1월 영천문화원에서 개최한 신년교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여기저기서 인사가 오가고 행사가 진행됐고 성 회장에게 인사말의 기회가 주어졌을때 성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건냈다고 한다.
“나는 69살까지 돈과 권력이 최고인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인 건강이더라. 내가 69세에 죽었으면 오늘 여러분을 볼 일도 없지 않겠는가. 여러분, 하시는 일은 열심히 하시되 건강은 절대로 안 돌보면 안된다.”
성 회장은 “나는 일은 많이 했지만 자리가 만들어지면 다른 사람을 먼저 앉혔어요. 내가 한 일을 어디에 내세우거나 기록하는 것도 하지 않았죠. 지금 옛 이야기를 하니 오래전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름들이 떠오릅니다. 고인이 된 염길정 의원도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왔었는데 오랜만에 그 사람 생각도 나네요.”라며 말을 끝맺었다.
아들 태락씨는 “아버지가 여기 신녕에 오시는 것을 무첫 좋아하세요. 오시면 옛 지인분들과 바둑두시고 노시는 거예요. 늘 저에게 야야,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시간되면 치산한번 가자. 그러십니다.” 라고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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