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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소재 영천학사 출신 새내기 사회인 연재글 ②
2016년 05월 03일(화) 11:54 [영천시민신문]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자리잡은 영천학사가 개관한지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역출신 학생들이 수도권 소재 대학에 입학하면서 영천학사와 인연을 맺었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새내기 사회인이 된 이들의 사고를 담은 글을 매월 1회씩 연재한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가교가 되다

↑↑ 2016년 4월 24일 세종시에서.
ⓒ 영천시민뉴스
유년시절의 이야기부터 하고자 한다. 한국 3대 천문대 중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가 있어서 별빛마을로 불리는 정각리에서 나고 자랐다. 세 살터울인 형은 보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형이 다닐 때도 한 학년에 학생수가 5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학교가 폐교되면서 우리가족은 영천시내로 이사 나왔다. 그게 여섯 살 정도 인 것으로 기억한다. 시내로 이사 나오기 전까지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다. 경주 산내 큰집에 가기 위해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며 고생했던 기억, 마른 논밭을 뛰어다니며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한 기억, 우물을 지나 제법 깊은 여울에서 물장난을 치던 기억, 집 마당에서 키우던 토끼와 닭을 구경하던 기억, 밤에 마당에 있는 변소에 가는 게 무서워 어머니에게 조르던 기억 등이 어렴풋하다.

몇 년 후 8살이 된 나는 동부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살던 청호아파트와 동부초등학교는 걸어서 10여분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도로 양 옆으로는 포도밭 아니면 논이었다. 우리아파트와 학교 사이가 논과 과수원과 개여울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친구들과 그 길을 다니면서 놀았다. 도로보다는 논두렁으로 다니기 일 수였는데 그게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숙제나 준비물을 해간적은 거의 없다. 그래서 선생님께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 그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다지 주눅이 드는 성격도 아니었고 노느라 정신이 팔리면 내일에 대한 준비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전형적인 개구쟁이였던 것 같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날 그날 순간 순간을 모면하면서 즐겁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영천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그저 초등학교의 연장으로 놀며 지냈다. 그다지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나쁜 편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중간고사 공부를 했고, 국영수 100점을 받는 쾌거를 거두었다. 아직도 그때의 기분이 생각난다. 전교 10등 안에 진입해 본적은 없지만 20등 주변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이후 중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만큼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공부에 정을 붙이고 중학교를 졸업했다.
영천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땐 각오가 남달랐다. 중학교 때 상위권 아이들이 영천고와 영동고로 나누어지고, 또 포항이나 경주, 대구 등으로 유학을 간 탓도 있지만, 열심히 공부한 덕에 고등학교 첫 전국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했다. 중학교 때 나보다 많이 앞서 있던 친구들을 따라잡아서 기뻤다. 지금 생각해도 고등학교 입학하자 마자는 그 나이 때 걸맞지 않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공부를 열심히 했다. 새벽2시까지 서서 공부하고 7시에 일어났던 걸로 기억난다. 다만 그 때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쾌활한 성격이 좀 어두워졌던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초반에 바짝 공부하고는 금세 공부가 시시해져서 소설책을 많이 읽거나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인생의 목적을 잃었던 것 같다. 지금으로 치면 ‘중2병’정도 되려나? 그래도 최소한의 공부는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과를 선택했다. 천문학자나 수학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시시해졌고,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문과로 옮겼다. 담임선생님은 전교 일 이등을 다투는 내 이과 내신이 아까워 전과를 반대했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이과에 있었으면 수시 전형으로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크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평균적인 대학생활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수업을 듣고 밤새 술을 마시기도 하고, 도서관에 앉아 전공서적을 읽거나 봄소풍을 가거나, 농활, MT, 답사 등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다. 즐거웠지만 한편 쓸쓸하기도 했다.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의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려도 향수병인지 많이 외로웠다.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는데, 첨으로 혼자 지내는 게 갑갑하고 막막해서 많이 힘들어 했다. 수업을 마치고 빈방으로 돌아갈 때는 불안하기까지 했는데, 방문을 열고 텅 빈방을 바라볼 때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서울 생활에 적응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고 많이 고생했던 것 같다.
다행이 2008년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영천시청과 재경향우회의 인재양성의 뜻과 후배사랑으로 재경영천학사가 문을 열었다. 나는 1회 입학생이 되었다. 그 당시 40명 남짓 고향 선후배들이 동대문구 신설동 영천학사에 모여 함께 지냈는데, 덕분에 난 정서적으로 많이 안정되었다. 대학생활이 훨씬 편했고, 지내기가 수월했다. 지금 생각하면 향우회 어른들과 사감선생님들의 보살핌 덕에 대학생활을 더 안전하게 한 것 같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철학과 학생회장(과대표)을 맡아 과 행사를 이끌어나갔고, 3학년 1학기 극 초반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철학과 학생회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영천학사 자치회 부회장직도 수행했다. 나름 바쁘게 뭔가를 하면서 지냈다.
3학년이 끝나갈 때 즈음 진로에 대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시인이 되지는 못했다. 사람이 좋고 노는 게 좋아서 이것저것 많이 하긴 했지만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경력을 쌓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손에 잡히는 길이 없었다. 3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고민이 극에 달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자칫 방황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학사 어른들의 보살핌과 영천학사 학우들의 관심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사감선생님이었던 김상석 선생님과 면담도 많이 했는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친한 교수님과 상담도 하며 때 늦은 진로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3학년을 끝으로 휴학을 하고 영천으로 내려가서 쉬며 행시공부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행정고시를 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3학년 여름방학 때 쯤 이화여대에 다니던 친애하는 영천학사 동기 이은진과 산책하며 진로 얘기를 나눴던 일이다. 그 친구는 외무고시에 대해 알려줬는데, 그걸 듣고 다음날로 도서관에 가서 행정고시에 대한 책을 빌려봤다. 외국어가 약해 외무고시는 만만치 않아보였고, 행정부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시기도 하고. 그로부터 반년 후 실제로 행정고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사소한 일들이 모여 인생의 향방을 가르기도 하는 것 같다.

2010년 11월에 한양대학교 행정고시반 입반 시험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위 행시생이 되었다. 한양대 행정고시반에서 생활하며 공부했다. 일정 성적을 유지하면 기숙사부터 인터넷 강의, 특강, 모의시험 등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생활비외의 재정적으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참 고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행정고시 시험에 3번 떨어지고 4번 째 합격했다. 현재는 ‘5급공채’로 이름이 바뀐 행시에 대해 간략히 말하자면, 2월 경 PSAT라는 적성시험으로 1차 시험을 보고 7월 경 ‘행정법, 경제학, 행정학, 정치학, 선택1과목’으로 2차 시험을 본다. 11월 경 3차 면접을 끝으로 시험은 마무리된다. 요즘은 1차 시험으로 뽑는 정원대비 합격자수 비율이 낮아지고 3차 면접이 점점 강화되는 추세이긴 한데 그래도 2차 시험을 붙는 것이 핵심이다.
전공과 무관한 학업을 시작해 나가는 게 녹록치 않았다. 특히 경제학은 생소한 언어를 사용하고, 오래 사용하지 않은 수학적 사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 배워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행정법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행정학, 정치학은 사회학이긴 하지만 인문학과 유사한 점이 있어서 비교적 쉽게 공부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길고 험난한 과정이었다.
다행히 2011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 후 행정고시반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2차 시험은 녹록치 않았다. 2012년에는 1차 시험에도 떨어졌다. 낙심이 커 행시반을 나와 영천으로 돌아가 봄과 여름을 보내며 마음을 다독였다. 친애하는 영천학사후배 금창준도 영천에 있었기에 자주 같이 점심을 먹고 틈틈이 영천시립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곤 했다. 8월에 다시 서울로가 한양대학교 행시반에 입반하고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다시 공부에 열을 올렸다.
이듬해 2013년 2월에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치른 1차 시험엔 합격했지만 2차 시험은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2차 시험 성적을 보면서 내년에는 반드시 붙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마음을 다시 다잡고 공부에 매진했다.
2014년, 내게 있어서는 의미가 큰 해다. 행정고시에 최종합격한 해이기 때문이다. 그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7월 초 2차 시험을 치렀다. 2차 시험은 하루에 한 과목씩 5일 동안 서울대에서 이루어졌는데, 한 과목 한 과목 치를수록 점점 합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2차 시험 합격자 발표는 10월 14일이었기 때문에 약 3개월가량을 영천집에 내려가서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며 조용히 지냈다.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많이 지쳐있었다. 불합격에 대한 불안이 들 때도 있었고 악몽을 꾸기도 했다. 합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즐거워지다가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과 심경이 바뀌곤 했다. 만화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며 지냈다.
2014년 10월 14일 저녁 6시 합격자 발표날이었다. 우황청심환을 하나 사서 먹고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셨다. 나는 방문을 닫고 조용히 컴퓨터로 합격자 명단을 다운받았다. 스마트폰 문자로도 알려주지만 폰은 무음으로 해두고 찬찬히 명단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 수험번호가 적혀있었다.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실에 가서 ‘아버지!’하고 들뜬 목소리로 부르니 그제야 조용히 TV를 보시던 아버지도 ‘붙었냐?’하시며 벌떡 일어나셨다. 아들이 부담스러워할 까봐 모른 체 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께 명단을 보여드렸다.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는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나는 컴퓨터 의자에 앉아서 한참 울었다. 기쁘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수험생활 등 온갖 생각이 다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다음날로 상경해서 면접 준비를 한 달가량 했다. 면접스터디원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1.3배수에서 1배수로 줄이는 면접이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한해를 더 공부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치열하게 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다.
11월 면접을 보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다. 12월 2일에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데 그날도 우황청심환을 하나 사먹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면서 지냈다. 오후 6시 1분에 “10003809 14년 5급(행정)최종합격축하, 12.10~16 채용후보자등록기간준수 *인사혁신처”라는 문자가 왔다. 그렇게 내 수험생활을 마무리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 다행이다. 운도 많이 따라줬고, 주변에 좋은 사람도 많았으며, 학교의 지원도 든든했다. 모든 것에 감사한다.

그로부터 2년 반 가량이 지나가고 있다.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간략히 줄이겠다. 2~3주는 고마운 분들께 인사드리러 다닌다고 정신없었다. 12월이 가기 전에 패키지여행으로 부모님과 대만을 갔다 왔고, 친구와 일본에도 다녀왔다. 2015년 2월엔 혼자 유럽여행도 갔다왔다. 그것으로 나에 대한 보상을 줄이고, 4월에는 과천에 있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 입교해 5개월간 신임관리자과정 60기 과정을 수료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람들도 다 좋고 수업도 좋았다. 9월, 10월은 대구에 있는 ‘한국 PIM’이라는 자동차 엔지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에서 기업연수를 받았다. 11월부터 올해 3월 31일 까지는 경북도청에서 지방연수를 받았다. 덕분에 도청이 안동으로 이전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지방연수 기간 중에 영천시에서 1주일간 연수를 받기도 했다. 선배 공직자들 한 분 한 분 너무 잘 챙겨주셔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2016년 4월 1일자로 고용노동부에 발령받아 현재는 세종시에 거주 중이다. 이사 온지 한 달 채 되지 않는다. 맡은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신임사무관이다. 어깨가 무겁다. 행시가 끝나면 공부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인생은 배움의 연속인거 같다. 요즘도 새로운 걸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행정부에 들어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국가와 국민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지. 내년 9월엔 군대에 가야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생활할 생각이다.

경어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날 키워낸 고향 영천의 산천을 생각해봅니다. 동부초·영천중·영천고 선생님들, 고등학교 졸업할 때 금반지를 선물해준 영천고동문회 선배님들, 대학입학 할 때 장학금을 준 영천 상공회의소, 영천시청 공직자분들, 특히 인재양성과분들, 향우회 어른들, 영천학사 학우들, 영천학사 어른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 분 한 분 다 고마운 분들이기에 일일이 이름을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많이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천시민신문 기자  smtime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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