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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의 호국인물 누가 있나… 국난 때마다 선현 나타난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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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 영천의 역사적 호국인물 재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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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6월 28일(화) 08:36 [영천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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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한국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화포를 이용해 진포대첩을 승리로 이끈 최무선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2012년 고향인 마단마을에 설립한 최무선 과학관. | | ⓒ 영천시민뉴스 | | 대내외에서 영천을 부를 때 ‘호국의 성지’라고 한다. 그 만큼 국난극복에 앞장선 장엄한 선현(先賢)들의 호국정신이 깃든 향토유적과 호국관련 시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천인들은 나라에 위험이 닥쳤을 때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위기에서 구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영천의 역사적 호국인물을 재조명하고 호국과 관련이 있는 기관을 탐방해 호국성지 영천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해 본다. 이번 기획취재는 ‘호국도시 영천,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주제로 시리즈 8회에 걸쳐 보도한다. 첫 번째 순서로 영천의 호국인물과 역사에 남을 전투를 시대별로 소개하고 그 의의를 되새겨 본다.
글 싣는 순서
1회 : 영천의 역사적 호국인물 재조명하다
2회 : 호국도시의 상징 된 국립영천호국원
3회 : 새로움 추구 영천전투 메모리얼파크
4회 : 지역군부대·영천시 상호발전 손잡다
5회 : 통일대박 한반도 통일미래센터 가다
6회 : 평화 기원하는 용산전쟁기념관 탐방
7회 : 형제의 나라 참전국전적비 둘러보다
8회 : 호국도시영천 새로운 콘텐츠 만들자
◇ 신라시대부터 호국의 성지
영천의 호국인물은 골벌국과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고구려로 유인되어가던 중 골화(영천의 옛 지명·골벌의 다른 표현)의 여신이 나타나 첩자이므로 동행하지 말라고 말해 김유신을 구했다는 설화가 있다. 신라는 골벌국을 합병한 이후에도 골벌국에서 호국신에게 큰 제사를 지냈고 이는 영천이 신라시대부터 호국의 성지였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고려건국 무렵에는 영천을 지배하던 황보능장이 영천성을 만들어 적을 막아 고려건국에 공헌했다. 영천사람들은 용전리 고분과 완산 사이에 남아 있는 토성을 ‘금강산성’이라 하는데 통일신라시대 말 황보능장이 축조한 성으로 용마전설이 전해 온다. 그의 충의정신은 영천의 전통으로 이어져 영천에서 나라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호국인물을 연이어 배출하게 된다. 현재 육군 제3사관학교 경내에는 황보능장의 묘(도지정 문화재)가 실존하고 있다.
전민욱 경북도문화해설사는 “영천은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났고 승리할 수 있었던 발판에는 그 시대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 선현들의 기운이 이어졌기 때문에 호국의 길로 계속 나가갈 수 있었다. 한순간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했다.
◇ 우리나라 최초 화약을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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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우리나라 최초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장군. | | ⓒ 영천시민뉴스 | | 고려중기 1202년 경주의 별초군이 난을 일으켜 영천으로 쳐들어오자 이극인이 스스로 도군수가 되어 동생 수춘과 함께 반란군을 소탕했고 이후 상장군이 되어 북방에서 침입한 거란족을 섬멸하는데 공을 세웠다. 고려말 영천시 금호읍에서 태어난 최무선 장군은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을 발명했다. 화통도감을 설치해 화약을 생산하고 각종 화약무기를 제조했다. 1380년 왜군이 전함 500척을 이끌고 금강하구로 쳐들어오자 부원수로 출전해 자신이 만든 화약병기를 사용해 대승을 거두었다. 현재 영천시 금호읍에는 테마 과학관인 최무선과학관이 있고 서부동 종합스포츠센터(실내수영장) 옆에는 태권도 전용체육관인 최무선관이 있다. 또 도로명 주소에도 최무선로가 있다. 고려 공민왕때 영천에서 태어난 최용화는 포은 정몽주 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갔고 조선개국 이후에는 조전첩절재사가 되어 국경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적을 막았다.
김종식 전 영천문화원사무국장은 “최무선 장군은 과학자로서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면서 “화약무기의 개발로 전쟁의 형태, 특히 기존 해전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된다.”고 했다.
◇ 임진왜란 최초 영천성 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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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순몽 장군 위패가 모셔진 숭렬당 사당. | | ⓒ 영천시민뉴스 | | 조선시대에는 대마도를 정벌한 이순몽 장군이 있다. 대마도에서 동료들은 다 패했으나 홀로 부하 전원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장군의 사저인 숭렬당(보물 521호)은 영천시 성내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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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임진왜란시 경상좌도 의병장이었던 권응수 장군. | | ⓒ 영천시민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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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의병장 정세아와 아들 의번의 무덤이 있는 하절. | | ⓒ 영천시민뉴스 | |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천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의병진 창의정용군은 임진왜란 최초로 영천성 복성(탈환)했다. 신녕 의병장 권응수 장군과 그의 장인 성덕룡 처남 성훈·선적, 영천 의병장 정대임 장군과 그의 재종제 정대인, 정세아 장군과 그의 아들 의번·의안, 전삼달·최인제·손덕침·이온수·이일장·조희익·정천리 등 수많은 의병장이 있었고 의병의 수는 3560여명에 달했다. 의병들은 의진을 창의정용군이라 정하였고 군령에는 적을 보고 황겁하여 함부로 말하는 사람, 적을 보고 5보 이상 도망가는 사람, 장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 전투를 맞아 대오를 잃은 사람은 참형으로 다스리기로 했다. 영천성 탈환에 앞장 선 의병들의 특징은 부자 형제 친척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았고 문과 무과를 가리지 않고 다양했다. 영천의 선조들은 나라가 위급할 때 자신을 돌보지 않은 노블리주 오블리제를 실천했음을 보여준다.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노계 박인로 선생은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나 3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세아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의병으로서 세운 공로로 원종공신이 된다.
이밖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최여강 최여곤 등은 의병을 모았으나 임금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슬픈 마음에 귀향했다. 김윤려는 의병을 일으켜 강화상령에서 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웠다.
이원조 영천시청 문화예술담당은 “노계선생은 수군만호로 재직하며 전장에서 지은 가사 누항사 선상탄 등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상전투 진중노래라 할 수 있다”며 의미를 설명했다.
◇ 산남의진 영남 대표적 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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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구한말 영천의 의병활동을 기리는 산남의진비. | | ⓒ 영천시민뉴스 | | 일제의 국권 침탈기에서 강점기까지 영천의 항일 독립운동사는 산남의진의 활동에서부터 광복군의 대일투쟁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고종의 밀명을 받고 1906년 정환직·용기(자양면 충효리) 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 활동은 영남지방의 대표적 의병활동이다. 창의 목적이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동으로 북상하여 세력을 규합한 뒤 서울로 진격하는데 있었고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후일 13도 의병 연합군의 서울진공작전의 단초를 제공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이육사와 함께 투옥된 조재만(화남면 삼창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된 홍종현(화북면 입석리)과 조병진(화북면 오산리), 무장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원대·이진영(화북면 오산리), 영천경찰서 폭파미수사건으로 투옥된 김기용(창구동)이 있다. 또 김낙헌 권태용 김동필 김상률 김영길 김준운 손병헌 이범교 이영환 정규식 정원흥 정재호 조병화 한상택 황보선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제에 항쟁한 영천의 예술인도 많았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왕평 이응호와 백신애다. 또 항일 신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와 백학서원도 빼놓을 수 없다.
(사)항일운동선양사업회 조인호 영천전자고 교장은 “산남의진이 의병 연합군의 활동에 단초를 제공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면서 “특히 주목할 것은 의열단 간부학교 졸업생 가운데 영천출신이 5명이 있다는 점이다”고 설명했다.
◇ 영천전투 북진의 발판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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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만주 의열단 단원으로 독립운동에 앞장 선 이원대. | | ⓒ 영천시민뉴스 | |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중대장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을 벌인 이진영(화북면 오산리)은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육사7기로 졸업한 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남 화천전투에서 전사했다. 6·25전쟁사에서 영천전투는 국운을 바로 잡는 의미 있는 전투였다. 영천전투는 6·25전쟁이 발발한 그해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간의 전투다. 북한군은 기습남침 27일 만에 38선에서 220㎞ 떨어진 대전을 점령하고 9월 5일 영천에 도착했다. 만약 적이 영천이 점령하게 되면 낙동강 교두보를 구축한 대구 북방의 제1사단과 제6사단의 미군 전선도 후미가 찔러 부산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는 국군 7개 연대, 북한군 5개 연대 등 총 1만5000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다행히 아군이 승리하여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으며 적 사살 6799명, 포로 309명, 전차 7대·차량 85대·화포 14문·소총 2327정을 노획했다. 영천전투는 대구 외곽선을 끝까지 방어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던 적의 야욕을 완전히 분쇄하고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의 총 반격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전투의 승리는 6·25전쟁사에 있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70년 제9033부대에서 영천지구 전적비문을 세웠다.
이와 함께 신녕전투는 북한군 8사단이 안강을 거쳐 포항지구로 침투하려했으나 의성지구에서 패하자 계획을 변경해 신령지구를 거쳐 대구 측면을 공격하기로 한다. 만약 신녕지구가 무너지면 북한군이 팔공산을 점령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대구의 측면이 뚫리게 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8월 31일부터 9월 15일까지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아군의 승리로 북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신녕전투에 참전한 병력은 국군 8500명, 북한군 6500명이었다. 1958년 10월 육군 제1205건설공병단에서 영천지구 전승비문과 신녕지구 전승비문을 세웠다.
김정식 전 제3사관학교 교수는 “우리지역이 왜 호국충절의 고장인지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다.”며 “공간적인 측면에서도 호국이었고 인물적인 측면에서 보면 영천의 선현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한 진정한 리더였다”고 말했다.
- 장칠원·김기홍 기자 -
〈자료 : 내고장 전통가꾸기(영천군 발행) 충효의 고장 영천(박약회 발행) 영천·신녕전투(국방부 발행) 책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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