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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영천①]6·25전쟁 70주년… 1973년 펴낸 ‘6·25와 영천’ 책 입수
6·25전쟁과 영천전투사 소개
피난민 100만명이 들끓던 영천
2020년 06월 10일(수) 19:55 1115호 [영천시민신문]
 
올해는 6·25전쟁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사에서 최대 규모의 재앙을 초래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으나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세대와 자녀세대인 청소년들에게는 점점 멀어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옛이야기가 됐다. 안타깝게도 이제 전쟁에 참전했고 그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증인들도 고령으로 인해 생존자가 많이 남지 않았다. 전쟁 이후 태어나 대한민국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땀 흘린 주역들과 지금의 평화나 자유가 너무나 당연한 시대에 태어난 세대들이 공존해 살고 있는 지금, 70년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 다해 싸워야만 했던 참혹한 전쟁의 기억을 되새겨보고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더불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는 6·25전쟁 당시 기울어가던 국가의 명운을 되살린 우리 영천대첩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놓은 책, 몸소 겪은 이들의 이야기와 전투사를 엮어 자료로 쓰기위해 1973년 영천군교육청(교육장 김해인)에서 개간한 ‘6·25와 영천’이라는 책을 입수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6·25전쟁 70주년에 즈음하여 지역의 전쟁사에 대해 재조명하고 또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도 미래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중요한 노력이라 여겨서다. 총 10여 여 차례 걸쳐 연재형식으로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며 내용은 70년대 당시의 국어표기법에 의거하고 있다. <편집자주>


↑↑ 이번에 입수한 책 표지 모습.
ⓒ 영천시민뉴스
곳곳에 모내기가 한창인 6월 24일 기다리던 가정실습이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들꽃을 따서 입에 물고 바르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얼굴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어머니-.” 하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저씨께서 와 계셨습니다.

“오! 혜지 이제 오는구나.” 하시면서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그동안 안녕 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래, 오늘은 이 곳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혜지가 보고 싶어 왔다. 5학년이라면서? 예뻐졌구나.” 하시고는 나를 아저씨 옆에 앉게 하셨습니다. 아저씨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영천군내 여러 학교에 계셨습니다. 마루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지그시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마 무슨 생각에 잠기셨나 봅니다. 나는 아저씨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아저씨! 6·25에 대하여 이야기 좀 해주셔요. 공산군은 영천군까지 쳐들어와서 우리 국군과 많은 전투를 했다면서요?”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 아저씨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오! 그래, 내일이면 벌써 6·25 사변 23주년이 되는구나. 기억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일이지.” 하시고는 한숨을 내 쉬셨습니다. 그리고는 “너도 어디서 대략 이야기는 들었는가보구나. 저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보니 마구 불바다가 되어 활활 타오르던 전쟁터가 연상되는구나.” 하시면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푸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28살 되던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이었지. 조용한 일요일 새벽(4:30)을 뚫고 악독한 북한 공산당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평화로운 우리 대한민국에 쳐들어 왔단다. 그 때, 나는 영천읍 작산동에 있는 남부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아침 방송을 듣고 깜짝 놀랐지. 그러나 그렇게 큰 전쟁인줄 모르고 곧 우리국군이 물리 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튿날 경찰서 앞 벽보를 보고 큰 전쟁이 일어났음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단다. 같은 동족끼리 어쩌면 그런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공산군 아니면 할 수 없는 무서운 짓이 아니겠니.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점점 군내 곳곳으로 퍼져 갔단다. 그때가 아마 7월 8일쯤 되었을 거야 그 날도 나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자전거로 학교에 출근하는 길이었지. 영천교를 건너려는 나를 미군이 가로 막지 않겠니. 그리고는 지도 한 장을 보이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엇을 묻는 표정을 지우지 않겠니? 나는 불안해하면서도 손짓하는 모습을 보니 공산군이 어디쯤 왔느냐? 하는 질문인 것 같아 경기도 평택쯤 왔을 거라고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를 지도위를 가리키면서 말해주었지. 매우 고마워하며 담배를 권하더군. 지금 생각해도 그 미군 병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아마 미군들은 간밤에 부산에 상륙하여 영천까지 온 모양 같더라. 이런 일이 있은 지 10일 후 (7월 19일경) 영천읍 남문통의 어느 시계점에 볼일이 있어 갔더니 경주 대구 사이의 국도가 먼지에 쌓여 있고 완전 무장한 유우엔군들을 실은 트럭이 200m간격으로 무려 3시간이나 지나가는 것을 보았단다.” “아유 굉장히 많은 유우엔군들이 왔겠군요?” 나는 다음 말씀 하실 전투 이야기를 얼른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 아마 약 900대의 트럭에 2만여 명의 유우엔군들이 탔을 것 같더라. 그런 유우엔군의 위용을 보니 마음이 든든하고 이제 곧 공산군을 물러 갈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단다. 그러나 10만의 유우엔군이 대전에 진지를 구축하고 공산군의 남하를 저지했으나 전쟁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우리 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여 피난민들은 남으로 남으로 밀려 와 영천군은 피난민들로 꽉 찼었단다. 정든 고향을 두고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등지에서 온 피난민들은 굶주리고 지쳐서 쓰러지고 그야말로 비참한 형편이었단다. 엄마 아빠를 잃고 우는 어린이들의 울부짖음이며 자식들을 잃어버린 부모들의 애타는 울음은 가슴을 더욱 아프게만 했었지. 우리가 사는 이곳 영천군은 경상북도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교통의 중심지는 물론 군 중심부에 금호강이 흐르고 사방으로 보현산 기룡산 조림산 등의 높은 산이 성곽처럼 둘러싸여 좋은 요새지였기 때문에 영천군민들은 ‘설마 이곳까지야 공산군이 쳐들어오겠니?’ 하고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었단다. 그러나 불안과 초조는 날이 갈수록 더했지. 8월 중순경 전황은 불리해져서 유우엔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영천읍까지 후퇴를 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내가 근무하던 남부 초등학교의 건물과 읍내에 있는 모든 학교 건물은 유우엔군과 국군의 부대 본부로 사용하게 되었단다. 학교는 임시로 방학을 앞당겨 하고 어린이들의 손때 묻은 책걸상과 학교 비품은 창고와 이웃 과수원으로 옮기고 학교를 내어 주었지 그때 나의 마음은 어떻게 하던지 전쟁이 하루 속히 끝나고 우리 어린이들과 다시 책걸상을 마주하여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단다. 학교뿐만 아니라 영천읍 각 관공서와 문내동 중앙 초등학교 교장 사택에는 국군 정훈 부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그 옆에 있던 우리 집에도 방 한 칸만 우리 식구들이 쓰고 그 외에는 8사단 ㅇㅇ중대 본부로 사용하게 되었지. 이렇게 온 거리와 학교 관공서가 국군의 본부와 유우엔군의 주둔 지역으로 변해지니 불안은 더해 가더군. 드디어 그 해 8월 13일 공산군이 남침한지 50여일 후인 이날 우리 영천군 지역에도 공산군이 쳐들어와 전투가 시작 되었단다. 멀리서 포성이 들리고 낮이면 부상 군인들을 실은 앰뷸런스가 소리를 내어 달리고 온통 걷잡을 수 없는 형편이었단다.” 아저씨는 잠시 말씀을 멈추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나는 아저씨 옆으로 다가앉으면서 숨찬 어조로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천군은 읍이 하나고 면이 열 개나 되는 군인데 전투가 군 서남지대의 청통면 금호면 대창면 화산면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산군과의 격전지였단다. 제일 먼저 격전이 벌어진 곳은 영천군 북부에 있는 보현산 부근 전투인데 8월 13일부터 9월 4일까지 무려 23일간 계속되었지. 또 북서부에 위치한 신녕지구 전투는 8월 30일부터 9월 15일까지 17일간 계속되었으며 맨 끝으로 영천중앙 부근을 중심으로 한 영천지구 전투는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약 10일 동안 계속되었단다. 밤마다 대포소리 폭격소리가 요란한 이 때의 영천읍내는 피난민이 100만이 들끓었단다. 산과 들에는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전쟁의 쓰라림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지. 이 피난민들도 보현산 전투가 끝날 무렵엔 다시 경산 하양 청도 방면의 남쪽으로 내려가야만 되었단다.” “아저씨 그럼 보현산 전투부터 더 자세히 이야기 해 주세요. 정말 무시무시하고 처참한 싸움터가 되었겠네요?” 전투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들에서 모심기를 하시던 아버지가 집에 오셨습니다.

“여, 우리 교장선생이 오셨구먼.” 아버지의 굵은 목소리가 아저씨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요사이 한창 바쁘시겠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데 혜지가 우리 고장의 6·25 사변에 대하여 이야기 해 달라기에 지금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좋지,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당시의 6·25는 전면 모르고 있는 걸세.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상세히 이야기 해주려무나. 이제 혜지는 5학년이니 그런 공부를 해야지. 나도 언젠가 자세히 이야기하려 했었는데 농사일이 바쁘니 그런 틈이 없었구나. 마침 오늘은 잘 되었다. 네 아저씨도 왔고 하니 저 서랍을 열어 봐. 검은 표지의 수첩이 있을 거야. 그것이 그 때의 전투 날짜가 적혀 있어.” 하시고는 아버지는 우물물을 퍼서 세수를 하십니다. 왠지 오늘따라 뻐꾸기가 처량히 웁니다. 6·25 때 돌아가신 국군 용사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우는지도 모릅니다.
<다음호에 보현산 전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박순하 시민기자  smtime@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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